공지사항



일제시대를 실제로 살아본 분들의 증언펌 Coco 24-09-25 14:29

부산고구려$ 이상우 작가님의 영상을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책을 읽게 되어 기대가 많이 되었다.​1부 교육 환경개경 교육은 경제 발전 못지 않게 도시로 인재를 끌어들이고 재생산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평양, 백제의 공주와 부여, 신라의 경주와 같은 곳도 있지만 개경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해동공자 최충 개경에는 12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최충의 문헌공도가 단연 최고의 수준이었다. 최충은 현재의 현우진처럼 1타 강사로 여겨졌다.​→ 결국 한 나라의 수도에 사람이 모이고 그 곳으로 교육이 몰리면 더욱 사람이 모이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용산과 삼각산 용산 인근에 진 씨라는 1타 강사가 살았고 선비들은 이 근방에서 숙식하면서 진수재의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사에는 삼각산에서 공부 했다는 인물들이 적잖게 보인다. 개경 명문가의 자제들보다는 과거 급제가 조금 더 절실한 계층이 이곳을 찾았던 것 같다. ​→ 현재 가난한 고시생들이 신림에 모이는 것처럼 당시 서울(남경)이 고려 시대의 고시원의 역할을 한 것을 보인다. ​선산 조선시대 선산은 경북의 작은 고을으로 영남 사림들이 모여있었다. 개국부터 단종까지 급제자를 분석해보면 타 군,현에 비해 선산의 평균은 9배를 기록했다. 선산의 성공비결로는 한양-충주-대구-부산을 잇는 영남대로가 선산을 관통하고 다수의 저수지를 통한 논농사가 발달한 곳이기 때문이다. ​→ 최근에 인구에 관심이 많아서 자주 보는 유투브 채널이다. 여기서도 조선시대의 수운을 이용한 교통에서 경부선과 철도의 발달로 도시의 쇠퇴가 나오고 있는데, 수운이 중심일 때 충주가 발달되었지만 철도의 발전 이후 대전이 크게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선산이 양남대로의 일부인 것도 선산의 발전에 부산고구려$ 큰 영향일 것이다. ​한양새 수도 한양 조선은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를 했다. 조선의 큰 고민은 개경에 사는 명문세가들이 조정을 따라 한양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한양에 4개의 학교를 세워서 한양을 살릴 방안으로 교육을 선택했다. 이는 1970년대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이주한 것과 비슷하다. ​→ 최근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sky 대학의 정원을 지역별로 정원을 할당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서울 집중화의 원인이 서울의 사교육을 원인으로 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실현 가능성은 낮아보이지만 우리나라부동산에 교육이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적 네트워크 대한민국의 교육의 목표는 '좋은 학교'에 가는 것과 좋은 학교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부자들에겐 첫번째 (더 좋은 학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두 번째 (좋은 사람과의 네트워크)에 힘을 쏟는다. 그러한 노력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주거지를 이동한다. ​학군지 유명한 일반고에 입학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동네에 살면 된다. 평준화 정책 이후 학군지 학교에 입학하는 방법은 학군지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강남 8학군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서울 평균 아파트 매매가보다 훨씬 높다. ​→ 결국 부자들은 좋은 사람과의 네트워크를 원하고 학군지로 이사가길 원한다. 학군지는 부동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다.​2부 직주 근접북촌 대한민국의 부동산 1등은 강남이다. 교육, 인프라 교통의 편리함, 통근 거리 모두가 훌륭하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네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궁과의 거리다. 궁궐과 가장 가까운 동네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의 가회동, 재동, 원서동, 안국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당시 부산고구려$ 관리와 현재 공무원 월급을 비교해보면 현재 시세로 15억정도 한다고 한다. 지금 서울 아파트 가격과 비슷하다.​중촌 중촌은 청계천과 종로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의관, 율관, 역관 등의 전문직 관리와 하급관료, 상인 등 중인 계층이 주로 살았다. 신기하게 중촌은 현재 각종 기업과 기관들이 즐비하고 있다. 고려시의 양반들은 상업지구를 선호했지만 조선 양반들은 번화가를 꺼렸다. 그래서 한양 양반들은 시전이 모여 있는 종로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북촌이나 남촌에 살았다.​남촌 남촌은 지금의 충무로, 명동, 남산동, 인현동, 회현동 일대다. 조선시대 남촌은 북촌에 살 만큼 부유하지 않거나 군인 가족이 많이 살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낙점되면서 남촌은 발전되었다. 남촌에 일본인 자본이 들어오면서 미쓰코시백화점(좌)와 경성조선은행(우)이 생겼고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과 한국은행이 되었다. ​→ 조선시대 북촌과 중촌이 발달 되었지만 인구와 경제가 성장하면서 남촌까지 발전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강남지역을 성장시켜 강북을 추월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이 성장하면서 경기 남부 지역까지 도시가 확장되었다. 하지만, 최근부터 대한민국 경제와 인구의 성장 둔화 및 쇠퇴가 예상되면서 오히려 더욱 서울 집중적인 현상이 나타지 않을까 싶다. ​기업의 입지 기업의 지역 이전을 보면 '현재'가장 인기 있는 지역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성장하는 업체들은 성남(판교), 용인, 화성 등에 위치해 있다. 해당 회사 실적이 좋아지고 주가가 상승하면 직원들의 급여가 오른다. 직원들의 급여가 오르면 주택의 가격이 오른다. 3대 IT 기업의 급여 총액 증가율과 경기도 아파트 가격 상승률이 같이 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최근의 많은 게임 업계들이 판교에서 강남으로 이전하고 있다. 게임 업계의 성장으로 강남의 부산고구려$ 임대료를 부담하고 남을 만큼 성장했고 직원들의 소득이 높아져서 더 좋은 '접근성'을 가진 강남으로 이전하고 있다.​3부 교통 호재김해 금관가야(김해)는 무역 거점으로 한사군, 마한, 진한, 왜가 연결되는 교통로였다. 고려시대에도 일본과 공식적으로 교역은 안했지만, 무역관을 설치해 무역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형의 변화로 인해 김해는 고려시대까지만 무역항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이후 김해평야가 형성되어 무역업이 아니라 정미업이 발달한 농업도시가 되었으며 그동안 개발제한이 되었던 김해평야 부근이 최근 신도시들로 변모하였다. 도시를 둘러썬 환경은 계속 변하고 도시의 흥망 성쇠의 광정을 거친다.​충주 충주는 한강 뱃길과 육로 교통의 거점에 자리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영남대로(한양-용인-죽산-충주-조령-문경-상주-선산-안동-대구-밀양-동래)에 속했으며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 교통에서도 요충지였다. 특히 경상, 충청, 강원의 모든 세금이 충주를 거쳐서 한양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경부선(서울-천안-대전-김천-대구-부산)라인이 부각하면서 영남대로 라인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의 발전으로 수운의 영향력은 더욱 감소했다. ​→ 앞의 1장 선산에서도 나왔듯이 교통의 발달이 도시의 성장과 쇠퇴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영남대로의 일부였던 지역들은 경부선의 발달로 인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중 충주는 조선시대 거대도시였다가 지금은 중소도시로 쇠락하게 되었다. 반면 대전은 경부선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광역시가 되었다. ​남경 고려시대 한양은 양주였다. 개경과 하삼도(충천, 전라, 경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현재의 광진구 일대 '장단나룻길'을 통해서 한강을 건넜다. 고려 문종은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하면서 면악(북악산) 남쪽인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면서 남경의 중심은 현재의 종로가 되었다. 이후 '장단나룻길'에서 '임진나룻길'로 교통의 요지가 변화하였다. 그 후 남경 그리고 한양의 중심은 '임진나룻길'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현재의 고속버스터미널은 사평나루 권역이고 동서울터미널은 광진구 부산고구려$ 권역이다. ​→ 교통의 변화가 지금의 서울의 중심지를 바꿨다고 볼 수 있다. 교통의 중심지는 결국 도시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고 교통이 쇠퇴하는 곳은 도시가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정주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위 도시는 한양이었고 2위는 정주였다. 정주는 의주로(한양-의주)의 한 도시로서 평북지역의 대표 도시였다. 대한민국의 제 1도로는 경부고속도로다. 반면 조선시대 제 1도로는 중국과의 교류로 인하여 의주로다. 청천강을 기준으로 청남의 대표도시가 평양, 청북의 대표도시가 의주인데, 이 두 도시를 잇는 교통의 요지가 청북의 관문인 정주다. ​→ 교통이 발달한 도시는 결국 발전한다는 또다른 예이다.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약 통일이 된다면 투자를 어디에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의주로를 따라서 투자를 하면 실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고속도로 고속도로에서 중요한 점은 진입로의 개수이다. 진입로의 개수가 편의성과 원활함을 결정한다. 대한민국 고속도로는 남북위주로 발달되어 있고 동서의 발달이 덜 되어있다. 그래서 국가간선도로망을 10x10으로 늘린다는 계획이 있다. 고속도로는 집 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구리-포천고속도로와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의정부와 파주의 집 값에 영향을 미쳤다. 순환고속도로는 신도시의 경계를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 철도, 고속철도, 고속도로 지화화 최근 철도는 새롭게 철도를 신설보다는 기존 노선의 연장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노선을 새로 깔자고 하면 저항에 부딪히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선을 늘이다 보면 다른 노선들과 연결된다. 최근 고속철도의 발달과 GTX 수도권 확장으로 장거리 통근이 더 늘어나고 있다. 수도권의 범위가 더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속도로로 인한 미세먼지 및 소음으로 주민들의 불편함이 커지고 있다. 해결책으로 뚜껑(터널형 방음시설)을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고속도로 지화화로 문제를 해결한다. 경인고속도로와 서부간선도로가 부산고구려$ 지하화를 통해 교통 정체를 완화했을 뿐 아니라 지상 공원도 조성했다. 경부고속도로도 지하화 이슈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4부 자연 환경서울한반도에서 왕조의 수도로 선택된 도시는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도시가 수도로 선택된 이유는 '강'이다. 강이 있으면 잉여 식량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다양한 직업과 도시가 발전한다. 특히 한반도는 수운이 발달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강이 있는 서울이 수도가 되었다. ​ 소금, 철 '농업 혁명'이후 나트륨 결핍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트륨이 함유된 소금 등을 따로 섭취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로마에서는 소금을 월급으로 줬는데 급여를 의미하는 샐러리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다. 철은 고대 시대에 농기구와 무기의 재료로 강력한 자원이었다. 울산 달천, 경북 울진, 충남 서산, 충북 청주, 경남 김해 마산, 전북 남원 등에서 고대 시대부터 철이 나왔고 이 지역들은 과거에 국가의 중심지이거나 부유했던 곳이다. ​유수지, 산, 매립 좋지 않은 입지의 단점을 극복하게 해준 것이 과학기술이다. 유수지는 홍수가 났을 때 일시적으로나마 물이 놀 수 있게 하는 연못이다. 지대가 낮아 집을 지으면 물이 차오른다. '복개'를 통해 유수지에 덮개를 씌어 아래는 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하며 지상부에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산 아래에 지어진 집은 산사태에 위험하다. 하지만, 옹벽과 축대로 해결하여 산주위에 아파트를 짓기도 한다. 또한, 물이 있는 곳을 메워서 그 위에 아파트를 짓기도 한다. 현재의 잠실동과 서부이촌동 등이 매립지에 아파트를 지은 곳이다. 매립 전의 잠실도1,2기 신도시, 이전부지 1기 신도시들에는 거대한 중앙공원이 있고 그 중 유명한 곳이 일산호수공원이다. 고양시 일산호수공원 2기 부산고구려$ 신도시에는 호수공원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간공원 특례사업과 초대단지에 조성한 공원 등이 있다. 군부대가 이전한 자리는 여러가지 개발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용산 주한미군기지, 의정부 미군기지 등이 있다. 용산공원 조성 부지 현황5부 도시 계획신수도 한양 조선시대 한양 천도는 이성계의 강한 의지였다. 성리학과 풍수학의 대립으로 궁궐 북쪽 북악산에 시장대신 현재의 종로에 시장을 형성했다. 하지만 수백 년간 개경에 쌓인 인프라와 비교할 수 없었다.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불편했다. 그래서 개경의 시장을 5년간 폐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개경 주민들에게 한양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 70년대 강남과 90년대 신도시도 처음에 자리 잡는데 불편한 점이 많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신도시는 자리를 잡기까지 과정에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한다. ​성저십리 시간이 흐르고 한양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주택난이 나타났다. 사대문 안이 포화상태가 되자 만들어진 것이 성저십리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부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저십리 지역에서 인구가 크게 늘었다. 조선판 '광주대단지'사건이 있는데 한양도성 원주민을 강제로 성저십리로 이주시킨 사건이다. 성저십리 주민들은 세금을 이중 부담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서울집값 과거 급제한 양반조차 집값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한양의 집값이었다. 100여 년 동안 10배 정도 서울 집값이 상승했다고 한다. 영조는 대책으로 극약처방을 내렸는데, 현재의 1가구 1주택만 허용하는 정책과 전월세를 막아버렸다. 시장을 교란한 후폭풍은 매우 컸다. 영자가 쓴 고강도 집값 억제 대책이 성공하지 못했다.​→ 최근 부동산 폭등을 잡겠다고 나오는 정책들과 영조의 정책이 유사해 보인다. 역사를 제대로 배웠고 시장의 중요성을 잘 알면 이런 실패들을 적어도 줄일 수 있지 부산고구려$ 않았을까 싶다.​화성 조선 시대 가장 유명한 신도시는 수원 화성이다. 화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상회를 열게하고 상공업 진흥책을 사용했다. 또한 수원지역에 특별 과거를 열어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다만 정조 사후로 화성의 신도시 발전은 실패로 끝났다.​공장, 역 공장은 여러 이유로 비선호 지역이었다. 하지만 성수동, 문래동은 공장 밀집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젊은이들이 찾는 명소로바뀌었다. 또한, 공장부지가 공원 지식산업센터 등으로 바뀌면서 지역 기피시설에서 인기 지역으로 변하기도 한다. 특히 성동구 성수동 삼표레미콘 공장은 22년 8월 철거를 완료했다.​ 역 주변에는 혐오시설이 많았다. 특히, 역 근처에 혐오시설인 '집장촌'등이 있었다.이런 혐오시설을 선호 시설로 대체되고 있다. ​신도시 2기 신도시는 입주시기와 교통의 준비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에야 교통의 개통이 일어난 곳들도 있고 아직 개통이 안된 곳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3기 시도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1기 신도시가 어느덧 30년차가 되어서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해당 책에서는 교육 환경, 직주 근접, 교통 호재, 자연 환경, 도시 계획 5가지로 나누어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책의 내용을 보면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이 원하는 지역은 비슷했다. 사람의 본능이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것은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좋은 곳은 비슷하다. 또한, 현재의 여러가지 부동산 문제들도 과거에도 있었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미래의 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읽었으며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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